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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성격

구상 선생은  3ㆍ1 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 9월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종진(具鍾震) 씨가 쉰에, 어머니 이정자(李貞子) 여사가 마흔넷에 얻은 늦둥이였다. 태어날 때 집에서 지어 준 이름은 원래 구상준(具常浚)이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집에서 “상아, 상아” 하고 부르다 보니 결국 ‘상’ 이라는 외자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구상 시인에게는 형님이 두 분 있었다. 한 분은 가톨릭 신부가 되었고, 다른 한 분은 동경 유학 중 행방불명되었다.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후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의 형 구대준(具大浚) 신부는 해방 후에도 북한에 머물며 포교 활동을 하다가 1949년에 투옥되었다. 당시 같이 잡혀간 독일인 신부들은 1954년 국제적십자사의 중재로 독일로 돌아가게 됐지만 형님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독일로 돌아갔던 신부들 중 일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왜관에 포교 활동을 벌였는데,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한국 진출 60주년을 기념해 각종 자료 전시회를 열었을 때 구상 시인의 어머니와 외숙모, 사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전시되었다. 그때 독일 신부에게서 받은 사진이 구상 선생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가족사진이었다. 구상 시인 가족은 구상 시인이 네 살 때 원산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옮겼다. 독일계 신부들이 원산에 교구를 개설하면서 교육사업을 그의 아버지에게 맡겼던 것이다. 구상 시인의 아버지는 해성학원을 셋이나 세우고 원장으로 계셨으며, 농사도 60마지기 넘게 지으셨다. 원산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그는 형처럼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그의 가슴에서 들 끊고 있는 일제와 신(神)과 제도에 대한 저항 의식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심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글이 그의 자전적 시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에 실려 있다.
소신학생(小神學生)이 정월 초하루 아침 백설(白雪) 차림의 황후폐하(皇后陛下) 사진을  신문서 도려 갖고 후들후들 변소로 들어섰다
창세기(創世記)의 배암이 왼몸을 조여 모독(冒瀆)의 정열을 고름 빼듯 한 후 3년 머물던 수도원을 등졌다.
나는 주의자(主義者)가 되었다.

일제 치하였던 당시 정월 초하루에는 일본 천왕과 왕후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는데. 구상 선생은 왕후의 얼굴을 오려내 모독을 주는 방법으로 나름대로 일제에 저항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일제에 대한 저항 때문에만 학교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신학교를 그만둔 구상 시인은 일반 중학교로 전학가지만 금방 퇴학당하고 말았다. 문학을 한다며 이른바 불령선인 (不逞鮮人:불평불만을 일삼은 조선인)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결국시인은 고향을 떠나 노동판을 전전하기도 하고 야학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밀항을 한 것이다. 그곳에서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연필공장, 성냥공장 등에서 일당 노동자로 일하다가 아는 선배의 권유로 일본대학 종교과와 명치대학 문예과 전문부에 시험을 치게 되었다. 당시 대학에 들어가려면 고등학교 예과를 나와야 했는데 졸업장이 없는 그로서는 전문부에 지원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는 두 곳에 모두 합격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곳은 일본대학 종교과였다. 종교과에 입학하자 집에서 학비를 보내 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불교 ㆍ 기독교 ㆍ 가톨릭 등 각 종교의 철학적 근거를 배우며 자신의 정신적 근원을 다져 나갔다. 한편 저항적 기질을 갖고 있던 구상 시인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당시 그는 평등을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삼았던 까닭에 반상(班常)의 차별을 경멸해 반가(班家)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자신을 원산의 소농(小農) 가정출신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구상 시인의 고향을 원산으로 잘못 알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동경 유학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3개월 빨리 졸업하게 된 데다 아버지의 죽음과 형님의 흥남천주교회 부임으로 집에 어머니가 혼자 남게 되면서 귀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귀국 후 그는 글만 읽으며 시 쓰기에 매달렸다. 그런 그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서울 집 도련님이 주의(主義)를 하다가 정신이상에 걸렸다”며 폐인 취급을 했다. 게다가 마침 시인은 폐병까지 걸렸다(이때 폐병은 평생 그를 괴롭히게 되는데, 두 차례에 걸친 대수술로 그는 결국 한쪽 폐만 가지고 생활하게 된다). 그는 이내 교회 학원을 맡았는데, 그 무렵 조국이 해방되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그는 교원직업동맹 부위원장을 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가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이 광복 1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시집『응향(凝香)』에 실린 시 세편이 문제가 되면서 이른바 응향필화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가 『응향에 실은 「여명도(黎明圖)」, 「길」,「밤」등 세편의 시가 좌익 진영 평론가들에 의해 “퇴폐주의적이고 악마주의적이며 부르주아적이고 반인민적이다”라는 등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구상 시인은 자유를 찾아 월남을 감행했다. 38선 부근 연천에서 보안서원에게 붙잡히지만 필사의 탈출 끝에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한편 이 필화 사건은 남로당 진영의 문학가동맹과 민족진영 문단과의 일대 논전을 불러일으켰는데, 김동리 ㆍ 조연현 ㆍ 곽종원 ㆍ 임긍재 등이 그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그 후 구상 시인은 1949년 초에는 연합신문 문화부장을, 6ㆍ25 전쟁 중에는 국방부 기관지인 승리일보를 만들며 종군했다. 그 공로로 1955년에 민간인으로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1952년 전세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승리일보가 폐간되자 구상 시인은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정치권은 정치 파동으로 무척 혼란스러웠는데, 신문의 반독재적 성향 때문에 당시 영남일보는 계엄령 하의 부산에서 여러 차례 압수당했는가 하면 기관원을 사칭하는 괴한이 그의 집에 권총을 쏘며 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상 시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53년에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을 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난한 이 평론집은 곧바로 판매 금지되었다. 서울 환도 후에도 주변 사정으로 대구에 머물러 있던 구상 시인은 1959년 초 야당에서 이승만 독재 반대 운동을 벌이는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의 문화부장을 맡아 이승만 독재를 반대하는 강연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자 자유당 정권은 이적(利敵) 병기(兵器)를 북한에 밀반출하려했다는 혐의로 구상 시인을 잡아넣었다. 구상 시인의 친구가 남대문 시장에서 미제 진공관 두 개를 동경대학교에서 연체생물 연구를 하고 있는 사위에게 사 보낸 것을 구실 삼아 반공법 위반죄로 그와 친구를 잡아넣은 것이다. 검찰은 그에게 15년형을 구형했다. 이에 대해 구상 시인은 최후 진술에서 “조국에 모반한 죄목을 쓰고 유기형수(有期刑囚)가 되느니보다 무죄가 아니면 사형을 달라”고 말했다. 다행히 재판관이 무죄를 선언함으로써 그는 6개월여 만에 풀려났다.

그 사건 후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현실에서 일체 손을 떼고 오직 문학만을 하며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후 그의 결심대로 일체의 사회적 직책을 맡지 않았다. 대신 그가 선택한 길은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효성여자대학,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하와이대학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역시 시인은 일체의 보직을 사양했다. 서라벌 예술대학이 설립될 때 초대 학장 자리를 거절했고, 국민대 설립자인 김성곤 전 공화당 의원이 총장 자리를 제의했을 때도 조금도 미련 없이 사양했다.

정치권이라고 그를 가만 내버려두었을 리 만무했다. 처음 구상 시인에게 정계 입문을 제의한 사람은 해공 신익희 선생이었다. 1950년대 중반 구상 시인의 이름이 『민주고발』사건 등으로 널리 알려졌을 때 민국당 선전부장으로 일할 것을 권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4ㆍ19 직후에는 장면 총리가 경북 칠곡 민의원 후보로 공천해놓고 당시 그가 몸담고 있는 서강대로 찾아왔다. 그러자 구상 시인은 그 길로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이 사단장으로 있는 강원도의 한 부대로 가서 후보 등록 마감일이 끝날 때까지 20일간 숨어 있다가 돌아왔다. 장면 총리의 정치 입문 권유는 집요해서 이번에는 참의원 선거에 나가 달라고 부탁해 왔다. 그러자 구상 시인은 다시 제주도로 피신해서 당시 승려였던 고은 시인과 40일간을 지내다 서울로 돌아왔다.

그 다음에 그에게 정치 입문을 권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5ㆍ16 직후 박 대통령은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내정해 놓고는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구상 시인은 끝내 박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하고 경향신문 동경 지국장으로 나감으로써 곤혹스러운 처지에서 벗어났다.

구상 시인과 박 전 대통령은 이용문(李龍文) 장군의 소개로 5ㆍ16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1949년 육군 정보국에 들어갔을 때 당시 정보국장이었던 이 장군과 알게 된 구상 시인은 그와 이내 친해져 밤낮 술자리를 함께 하는 사이가 됐는데, 그가 박 전 대통령을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그 뒤로 의기투합해 자주 어울렸다.

세 사람 중 이 장군이 1953년 6월 24일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비행기 사고였다. 그날은 대구에서 저녁에 셋이 함께 만나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5ㆍ16 후 박 대통령은 수유리에 이 장군의 동상을 건립했는데, 물론 구상 시인도 그 일에 관여했다. 박 대통령 서거 후에 세 사람 중 홀로 남은 구상 시인은 박 전 대통령을 위해 5년간이나 제사를 올려 주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생전에 구상 시인은 박 전 대통령을 ‘박 첨지’라고 불렀다. 관(官)에 나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한 번도 박 전 대통령보고 ‘각하’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 후로도 5공 때 민정당 10인 발기위원회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이며, 총재 고문, 전국구 의원 등의 제의가 끊임없이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구상 시인은 1953년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는 왜관으로 내려가 1974년까지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왜관과 시인의 인연은 아주 각별하다. 본적지라는 것 말고도 유일한 가족사진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고, 아내 서영옥 여사가 병원 개업을 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낙동강이 바라다 보이는 왜관은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구상시인의 시의 원천이기도 했다. 게다가 2002년에는 구상문학관이 그곳에 세워졌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두 아들을 일찍 가슴에 묻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큰아들 구홍은 1997년 9월 10일 폐렴으로, 둘째 아들 구성은 1987년 폐결핵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게다가 1993년에는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었던 아내 또한 타계했다. 남은 가족으로는 소설을 쓰는 딸 자명 씨와 작은 아들이 남긴 유일한 혈육인 손녀가 전부이다. 노벨문학상 본선 심사에 두 번씩이나 올랐던 구상 시인의 시는 프랑스 ㆍ 영국 ㆍ 독일 ㆍ 스웨덴 ㆍ 일본 ㆍ 이탈리아 어로 번역 ㆍ 출판돼 널리 읽히고 있다. 1997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출판부에서 펴낸 『신성한 영감-예수의 삶을 그린 세계의 시』에 그의 신앙시 4편이 실렸을 정도로 그는 가톨릭을 대표하는 시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직접적인 언어로 신을 찬양하고 노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역사의식이 강하지만 어떤 목적 아래 시를 쓰지는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순수-참여 문학 논쟁이 문단에 불붙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문학의 길’을 묵묵히 걸었을 따름이다.

그는 시를 쓸 때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꾸며 겉과 속이 다른, 진실이 없는 말을 결코 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구상 시인은 이른바 기인(奇人)들과의 교류로도 유명했다. 천재 화가 이중섭을 극진히 돌보았는가 하면 시인 공초 오상순,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이자 ‘어린이 헌장’의 기초자인 마해송을 비롯해 걸레스님 중광에 이르기까지 그와 인간적으로 따뜻한 관계를 맺었던 기인들이 수없이 많다. 구상 시인은 특히 걸레스님 중광을 세상에 처음 알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중광 또한 자신을 알아본 시인에게 성심을 다했던 듯, 구상 시인의 둘째아들이 결핵을 앓고 있을 때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시회를 열고 그 수익금을 모두 희사해 요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다.

구상 시인은 박삼중 스님이 벌이는 사형수 돕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중 한 명을 양아들로 삼고 옥바라지를 하는 한편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는데, 결국 사형수는 7년 만에 무기로 감형된 데 이어 15년 만에 석방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행형 사상 유례가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한다. 그만이 아니라 구상 시인에게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 이들이 많다. 이처럼 그의 품은 넓고도 따스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이중섭 화백의 작품을 판 1억원을 이웃을 위해 스스럼없이 내놓은 것을 비롯해 투병 중에도 장애우 문학지 "솟대문학"에 그동안 아껴 두었던 2억원을 쾌척하는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늘 관심을 가져왔다.

이처럼 성자(聖子)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구상 시인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된 데다 교통사고 후유증까지 겹치면서 중환자실과 일반 병실을 오가며 힘들게 병마와 싸우다가 끝내 2004년 5월 11일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기다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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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문화과장민석054)979-6447
최종수정일 :
201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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