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속의 영원, 영원속의 오늘을 추구하는 시인 구상


관수재

구상문학관 관수재 안내-구상시인은 <영남일보> 주필겸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고질인 폐결핵이 재발하여 입원치료를 하는 중 도시생활이 부적합하게 되었다.
그 생환자 중 몇몇 분이 우리나라로 와서 천주교 대구교구 소속지인 왜관에다 수도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수도원 건축책임자인 명용인 수사님의 지휘감독으로 의원 한 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진주의 명 서가 은초 정명수선생께서 ‘관수세심(觀水洗心)’이란 제의를 써 주셨다고 한다.

구상시인은 <영남일보> 주필겸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고질인 폐결핵이 재발하여 입원치료를 하는 중 도시생활이 부적합하게 되었다. 그때 함경도 원산 교외 덕원에 있던 독일계 베네딕도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감금되어 있다가 휴전 후 국제적십자사의 노력으로 북한 감옥에서 풀려나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생환자 중 몇몇 분이 우리나라로 와서 천주교 대구교구 소속지인 왜관에다 수도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래서 구상시인은 친정 같은 수도원 이웃에다 이사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7만원이라는 금액으로 초가집 한 채가 있는 5백평의 땅을 매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수도원 건축책임자인 명용인 수사님의 지휘감독으로 의원 한 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사랑채에 고 파성 설창수 시인께서 ‘관수재(觀水齋)’라는 당호를 지어주었고, 진주의 명 서가 은초 정명수선생께서 ‘관수세심(觀水洗心)’이란 제의를 써 주셨다고 한다.

구상시인은 관수재에서 연작시 <밭일기> 100편과 <강> 60여편 등 왜관의 수도원 농장과 낙동강변에서의 삶이 구상시인의 시의 소재와 제재가 되었다.
또, 많은 문인들이 관수재를 방문하셨다. 그중 이중섭 화가는 <K씨인의 가족> 즉 구상시인과 가족을 그린 그림을 남겼다.

‘관수재’는 구상시인이 강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마음을 씻고 가다듬은 ‘觀水洗心’의 삶을 살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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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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